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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r_슈카월드 요약리뷰

[요약리뷰] 슈카월드 - 6월은 호국보훈의달,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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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한국어)

이 영상은 현충일을 맞아 6.25 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영웅들을 기리기 위한 내용입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로, 동작현충원과 대전현충원을 소개하며 6.25 전쟁의 주요 전투와 영웅들을 되새깁니다.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었으며, 유엔의 지원을 받아 한국군과 미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주요 전투로는 옹진반도 전투, 서울 함락, 춘천 전투, 대전 전투, 대구 사수 작전 등이 있으며, 특히 낙동강 방어선에서의 전투는 대한민국의 운명을 건 전투였습니다. 전쟁의 참혹함과 많은 희생을 기억하며, 현충일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을 강조합니다.

### Summary (English)

This video commemorates the heroes who sacrificed their lives during the Korean War in honor of Memorial Day. June is a month dedicated to honoring veterans in South Korea. The video introduces the Seoul National Cemetery and Daejeon National Cemetery while recounting the key battles and heroes of the Korean War, which began on June 25, 1950, with North Korea's invasion. Supported by the UN, South Korean and US forces engaged in fierce battles, including the Ongjin Peninsula battle, the fall of Seoul, the Battle of Chuncheon, the Battle of Daejeon, and the defense of Daegu. The Nakdong River Defense Line was particularly crucial in determining South Korea's fate. The video emphasizes remembering the war's horrors and the sacrifices made, underscoring the importance of Memorial Day.

 

 

 

6ㆍ25전쟁 목숨을 바친 영웅들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aAJFJebePrA

Transcript:
(01:10) 자, 앞에서 보셨듯이 6월은 호국보훈의 달 그리고 오늘은 현충일입니다 뒤에 있는 게 방금 보셨던 현충탑이죠 오늘은 특별히 현충일을 맞이해서 6.25전쟁을 갖고 왔습니다 6.25전쟁은 끝난지가 얼마 안된 전쟁이지만 생각보다 어떻게 지냈는지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한 분들도 꽤 많으실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자 그럼 현충원을 맞이해서 6.25전쟁 이야기를 한번 경건하게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앞에서 제가 갔다 온 곳이 서울시 동작현충원에 있는 현충탑입니다 어딨는지는 다 아시죠? 독립서울현충원은 생각보다 우리들에게 너무나 가까이에 있습니다 서울에 사시는 분들이라면 서울의 정중앙이죠 용산 맞은편, 여의도 동쪽 동작역에 내리시면 걸어서도 바로 가실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넓고 나무도 많고 걸을 수 있는 곳 그런 것들이 있어서 이 아이들 손잡고 이렇게 우리 무명 용사의 묘지도 있거든요 현충의 뜻을 기리면서 한번 아이들과 손잡고 한번 가볼 수 있는 그런 지역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서울 현충원 말고 대전 현충원도 있습니다 제가 대전의 현충원은 가보지 못했는데요
(02:12) 대전광역시에서 서북쪽에 올라간 왼쪽에 위치했다고 합니다 근처에 사시는 분들은 가보시면 좋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앞서 나왔지만 현충탑에는 이런 글귀가 써있습니다 정말 가슴을 울리는 글귀였는데요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인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그리고 앞에 충혼 이렇게 써있죠 이걸 보면 자기도 모르게 소름이 쫙 끼치면서 현충에 대한 목숨을 바친 용사분들의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는 곳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6.25 전쟁 특집이기 때문에 6.25 전쟁이 어떻게 진행이 됐는지를 저희가 천천히 역사의 길을 따라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1950년 6월 25일 그날이 왔죠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됩니다 6월 25일 날 남침이 시작되자마자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즉시 적대행위 중단과 철수를 요구하고요 6월 27일 날 대한민국에 대한 지원 권고 83호 결의안이 통과가 됩니다 하지만 북한이 남침을 멈추지 않았죠 1950년 6월 27일 미국의 해군과 공군이 가장 먼저
(03:15) 참전을 결정하는 정말 숨 가쁜 전쟁 상황이 이어지게 됩니다 특히 유엔을 통해 한국을 지원한 국가는 무려 60개국에 달했는데요 총 합계 60개국 당시 독립국가가 93개국이었다고 합니다 전세계 국가의 64%가 대한민국을 지원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6.25 전쟁의 진행 상황을 보면 6월 25일 그날 북한군은 동시다발적으로 38선 이남으로 진격을 하게 됩니다 특히 서쪽에서부터 차례대로 한번 살펴보면 우리가 잘 잊고 있는 전투들이 몇 개 있습니다 왼쪽에 있는 옹진 반도 전투라고 하는데요 딱 보시면 이게 옹진군입니다 그리고 반도가 옹진 반도인데 아마 많은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실 거예요 어? 여기 지금 우리나라 영토가 아닌데? 맞습니다 옛날에 6.
(03:58) 25전쟁 이전 3.8선 당시에는 여기도 대한민국의 영토였죠 소위 말해 월경지, 바다로만 연결된, 육지로는 연결이 안 돼 있고 바다로 연결된 월경지였죠 여기도 수천 명의 국군과 경찰이 주둔해 있었는데 북한군이 서쪽에서는 가장 먼저 옹진반도를 밀고 내려오고 여기를 지키던 국군과 경찰들은 나중에 인천으로 배를 타고 후퇴 작전을 펼치게 됩니다 그리고 가운데 내려온 여기 북한군의 주력군이 내려오는 거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1950년 6월 28일 단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될 당시에 북한군이 서울에 퍼뜨린 방송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렇게 북한군은 퍼뜨렸습니다 아 끔찍하죠 서울이 함락되고 아하 단 3일만에 북한군이 서울에서 점령 방송을 하게 됩니다 정말ㄹ믿기지 않는 일이었죠
(05:00) 이때 정말 많은 일이 있었죠 한강철교 폭파 사건도 있었고 왼쪽에는 옹진반도 가운데는 서울, 또 오른쪽을 보면 오른쪽에서 가장 큰 전투였던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춘천 전투입니다 북한군의 우익은 춘천을 점령하고 서울의 남부 또는 서부로 들어와서 서울을 포위해서 공격한다는 그런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춘천을 빠르게 점령해서 수도권을 완벽하게 포위하면 안에 있던 주요 정부 인사들이나 아니면 군인들이나 후퇴하지 못하고 독 안에 든 쥐처럼 북한이 다 잡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서 춘천을 빠르게 점령하려는 그런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북한군은 춘천을 향해 대단히 빠르게 내려오는데 국군이 춘천에서 결사항전을 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춘천전투인데요 얼마나 오래까지 버텼냐? 원래 북한군의 계획은 춘천을 빠르게 점령한 후 서울을 둘러싸는 거였지만 놀랍게도 춘천은 서울보다 더 오래 버티게 됩니다 서울이 무너진 6월 28일까지도 버텼고요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그야말로 병사들의 몸으로 시간을 쟁취해냈다 이런 표현이 나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북한군이 탱크로 밀고 들어왔는데
(06:01) 우리가 흔히 알듯이 그 당시의 국군은 북한군의 최신형 러시아 탱크에 대응할 만한 화력이 없었기 때문에 정말 몸으로 시간을 벌게 되죠 그래서 이 춘천 전투에서 창군 이래 최초로 위관급 태극 무공훈장 수령자가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심일 대위님인데요 우리가 흔히 교과서에서 많이 봤던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북한군의 탱크와 또는 자주포와 맞섰다는 그런 그림들이 기억이 나십니까? 탱크 몇 대를 파괴하는 그런 전공도 올렸다고 합니다 특히 1951년 이후의 전투에서 북한군의 총에 전사하고 시신도 지금 찾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1954년 미국 육군 은성무공훈장에 추서가 됐고요 심일의 대위 가족은 6.
(06:44) 25 영웅 가족으로 유명한데 셋째 동생 심익도 17세 학도병으로 6.25 전쟁에 참전한 다음에 전사를 하게 되고요 둘째 동생 신민은 후에 경찰로 근무 중에 과로로 순직을 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네 형제 중에 3명을 6.25 전쟁을 통해서 잃게 되고요 어머니는 이 이후에 6.25 참전용사들을 돕는 그런 일들을 정말 나중에 2005년에 별세하시는데 나중에까지 이어나가시게 됩니다 후에 특히 3만 제곱미터가 넘는 땅을 현충탑 부지로 내놓고 또 자신의 많은 재산을 6.25 참전용사들한테 기부하신 걸로 또 유명하게 되죠 그래서 이런 공적을 인정받아서 위관급 최초의 태극 무공훈장을 수령하게 되는데요 우리가 이렇게 서울이 함락된 다음에 북한군이 지속적으로 밀고 내려오니까 미국은 맥아더 사령관 사람과 당시 원수죠 맥아더더 원수와 불독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워커 중장, 오른쪽에 있는 분입니다 워커 장군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에 참전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워커일 호텔이 워커 중장의 이름을 땄죠 예전에는 워커 호텔이 정부가 지었기 때문에 전쟁 영웅인 워커 중장의 이름을 땄다고 할 수 있습니다
(07:47) 사실은 미국에는 대원수도 있습니다 미국에 대원수는 누가 있을까요? 미국 역사상 대원수는 단 4명 있습니다 식스스타입니다, 식스스타 5성 장군이 아닌 6성 장군 말 그대로 대원수죠 대원수 단 4명인데 대원수 중에 물론 가장 유명한 분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이고요 그 다음에 남북전쟁 당시에 북군의 총사령관 유명한 분이죠 율리시스 그랜트 그리고 1차 세계대전 총사령관 존 퍼싱 그리고 유일한 해군 대원수 조지 듀이 미국 역사상 이 네 분이 유일한 대원수라고 하고 썰에 따르면은 맥아더 장군, 맥아더 원수도 대원수로 하자는 그런 법안을 만들어서 올렸다고 합니다 근데 이게 통과도 잘 안 됐고 맥아더 장군이 스스로 고사했다 뭐 이런 썰이 있죠 결국 미국 역사상 대원수는 지금까지 네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이렇게 서울이 점령되고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게 됩니다 1950년 7월 1일 드디어 전쟁 발발 일주일이 조금 안 됐죠 일본에 있던 미국 육군이 한국에 처음 도착하게 됩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많이 봤던
(08:50) 바로 일명 스미스 부대죠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사실 북한군이 미군을 보면 이내 물러설 것이라고 생각을 했대요 왜냐하면 북한군을 약간 얕잡아봤고 천하무적의 미군 2차 세계대전을 이긴 미국이기 때문에 미군을 보면 북한군이 물러날 것이고 그러면 스미스 부대원들은 다시 일본으로 곧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약간 상황을 오판한 건데 1950년 7월 5일 드디어 북한군과 미군의 첫 교전이 시작이 됩니다 역시 교과서에서 많이 봤던 바로 그 오산 전투입니다 스미스 부대는 곡사포로 이루어진 포병이죠 포병 보병과 포병이 섞여있는 그런 포대 부대였는데 북한군은 당시 러시아로부터 받은 T -34 탱크로 무장한 기갑 부대였다고 합니다 기갑 부대하고 맞서는 일이 쉬울 일은 없었고 게다가 미군은 북한군을 좀 얕잡아 보던 그런 상황이었죠 그 결과 약 540여 명의 스미스 부대가 지도에 보이는 좌측 오산에서 북한군 탱크부대와 조우하는데요 결론적으로는 미군 보병 약 150여 명이 사망을 하고 포병 31명이 사망 또는 실종을 하는
(09:53) 미군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패배죠 대패를 했다고 할 수 있고 이 기세를 북한군은 남한의 중심을 넘어서 일제히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게 됩니다 오산 전투를 패배했기 때문에 그 다음에 국군과 미군이 우리나라 중부를 사수하기 위한 최대 전투를 치르는데 그게 바로 대전입니다 1950년 7월 19일에서 7월 20일 대전을 사수하라 일명 대전 전투인데 이때까지는 북한군이 내려오는 기세가 워낙 막강했기 때문에 대전을 사수하기는 정말 쉽지 않았죠 북한군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대전 전투가 펼쳐지는데 무려 4천여 명의 미군이 참전을 하고 천여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을 하게 됩니다 얼마나 치열하게 싸우는지를 알 수 있는 하나의 사건이 있는데요 이때 사단장이었던 미군의 장군, 딘 소장이 북한군의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후퇴하다가가 잡히게 되는데 태평양 전쟁 이후에 사로잡힌 미국의 최고의 장교 장군이 사로잡힌 일은 거의 없었는데 6.
(10:54) 25전쟁에서 장군이 사로잡혔다고 할 수 있고요 나중에 1954년 9월 4일 무려 3년 만에 포로 교환으로 석방이 되게 됩니다 처음에 북한군은 딘 소장이 장군인 줄 몰랐다 그러던데 나중에 알게 되죠 엄청나게 고초를 겪었겠죠 정말 앙상하게 뼈만 남은 상태에서 미국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고 훗날에 미국 최대 훈장, Medal of honor, 명예훈장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대전이 뚫림으로써 결국 전쟁 발발 2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전 국토의 90%를 상실하게 됩니다 물론 제가 얘기하지 않았던 자잘하거나 큰 전투들이 몇 개 있었어요 그리고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낙동강 방어선에 몰리게 됩니다 당시 김일성은 광복절인 8월 15일 이전에 부산을 점령할 것을 명령했다고 하고 대한민국은 정말 절체절명의 위기죠 이 낙동강 방어선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넘어가던가 아니면 하와이에 임시 망명정부를 설치해야 되냐 이런 의견까지 나올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아니면 낙동강 방어선을 이 상황에서 사수해야 되는 거죠 이때 한국전쟁에서 아마 가장 유명한 그런 말이 등장하게 됩니다
(11:59) 미군의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이 낙동강 방어선 일명 워커라인을 구축하는데요 전군에게 이렇게 메세지를 날리죠 Stand or Die 지키거나 죽어라 우리에게 후퇴는 없다 제 2의 덩케르크는 없다 덩케르크가 2차 세계대전에 독일군 나치에 맞서서 싸우다가 프랑스군과 연합군이 프랑스 덩케르크에 모이게 되죠 나치의 공격을 피해서 덩케르크 후퇴를 하는데 정말 목숨을 건 필살의 후퇴라는 것이 덩케르크죠 하지만 낙동강 방어선은 그런 후퇴는 없다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우리는 모두 함께 싸우다 같이 죽을 것이다 We'll die fighting together 라고 외치면서 저 stand or die '지키거나 or 죽어라'란 말이 그 당시에는 비판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한국이라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미국의 청년들에게 거기서 싸우다 죽으라는 말을 할 수 있냐 이런 비판을 많이 들었다 그러는데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워커라인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낸 정말 나라를 구하는 그런 말이라고 할 수 있죠
(13:01)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리고 낙동강 라인을 지키면서 커다란 전투가 세 번이 발생을 하는데요 그중에 가장 큰 대한민국의 운명을 건 전투 중에 하나죠 바로 대구 사수 작전이 펼쳐집니다 자 여기가 대구입니다 낙동강 안쪽에 있죠 여기가 낙동강이고 워커라인을 만들었습니다 당연히 가장 큰 도시였기 때문에 북한군은 대구를 함락한 다음에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오려는 이런 전략을 피우고 있었고요 무려 3개 사단을 동원해서 대구 점령을 시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정말 유명한 전투들이죠 다부동 전투와 왜관 전투라는 전투들이 펼쳐지는데 그 지역 이름입니다 앞이 왜관이고 다부동입니다 대구를 사수하기 위해서 앞선에서 정말 치열한 전투가 펼쳐지게 되는데 무려 4만 명 이상의 북한군이 집결했다고 하고요 낙동강을 건너 대구로 진격하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급박한 상황에서 8월 4일 낙동강의 모든 다리를 파괴하라는 명령이 하달이 되고요 이때 왜관교가 폭파가 됩니다 북한군의 공세가 워낙에 셌던 데다가 여기가 대구잖아요
(14:06) 8월 한여름에 대구에서 벌어지는 대전투입니다 게다가 주요 고지들이 다 산 위에 고지를 만들다 보니까 300m~800m고산지대 게다가 가뭄이었고 35도씨를 넘는 정말 우리나라에서 가장 더운 지역 대구에서 펼쳐지는 전투였기 때문에 군인들의 괴로움이 극에 달했다 그러고 더위와 모기 떼 특히 미군들은 한반도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서 정말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밀릴 수 있다는 판단이 드니까 더글라스 맥아더 미군사령관이 대구 앞에 있는 낙동강 부근에 있는 왜관에 전면 융단폭격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일본 기지에 있던 미군의 B-29 폭격기 98대가 출격을 해서 폭탄 960톤을 왜관에 전면적인 융단폭격을 하게 됩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래 최대 규모의 융단폭격이라고 할 수 있고요 실제로 이 폭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대구는 위험할 수도 있었죠 그리고 무려 25일간의 밤낮 없는 사수작전이 펼쳐지게 됩니다 낙동강을 사수하라 북한군은 무려 1만 7,500명의 사상자를 냈고
(15:11) 아군의 피해도 1만여 명이 넘었다 그러니까 낙동강을 넘어서 부산으로 내려오는 8월 공세를 엄청난 희생으로 막아내게 됩니다 또한 북한은 대구 쪽으로만 내려오진 않은데요 딱 보더라도 낙동강 방어선이 넓게 펼쳐져 있기 때문에 아래쪽으로도 들어왔습니다 부산의 좌측 마산을 점령해서 우회 기동을 하려는 작전이었는데요 북한군 제 6사단 1만 명이 아래에 있는 마산으로 우회 기동을 하게 됩니다 마산을 함락하고 앞에 다부동과 왜관 대구에서 대접전이 펼쳐지고 있으니까 우회해서 부산으로 진격하려는 그런 전투라고 할 수 있죠 무려 50일간의 처절한 전투를 하게 되는데 이때 가장 치열한 전장이 서북산 일대였다고 합니다 치열한 화력전 뺏고 뺏기는 고지전이 계속적으로 펼쳐지게 되고 여기 앞에 있는 산 이름이 상데미산이었다 그러는데 미국인들이 갓데미, 하도 욕을 해서 갓데미산으로 불렸다고 할 정도로 이런 일화까지 내려올 정도로 정말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고 북한군 사상자가 무려 7천여 명,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 사상자가 1,500명이 발생을 했고 결국 마산을 사수하게 됩니다
(16:15) 특히 이 마산을 방어하면서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밈이 탄생했다는 말이 있죠 이거는 사실 설왕설래가 좀 있어요 왜냐하면 이때 해병대가 통영 상륙 작전을 펼칩니다 아래 남쪽으로 마산으로 들어오려는 북한군의 옆을 치는 통영 상륙 작전을 펼치는데 종군 기자였던 마거렛 히긴스가 이때의 전황 보도를 이렇게 표현했대요 They might even capture the devil 그들은 악마도 잡을 기세였다 이 한 문장을 보냈다 그러는데 뭐 설왕설래가 있지만 이거를 보고 국내 언론들이 귀신 잡는 해병으로 사용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특히 마거렛 스는 한국전쟁을 취재하면서 여성 최초로 퓰리처 외국 통신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이렇게 엄청난 희생을 바탕으로 마산과 대구에 왔던 북한군의 8월 공세를 막아내게 됩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죠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과 북한군의 제가 보기에는 6.
(17:07) 25 전쟁에서 우리나라가 완전히 패배할 수도 있었던 마지막 전투 일명 북한군의 9월 공세 어디까지 밀려왔냐 영천 전투인데요 영천이 여기 있습니다 밀려 내려온 거죠 영천이 점령을 당했었어요 낙동강 라인이 밀려가지고 영천이 점령을 당하면서 여기서 밀리면 바로 부산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패전 직전에 몰렸던 바로 그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군 15호 사단과 8사단이 영천을 점령했고요 대한민국 국군이 6개 연대를 동원하여 역습을 감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 치열한 전투 끝에 영천을 탈환하게 되는데요 얼마나 전투가 치열했냐? 이 전투에서 북한군의 총참모장 오른쪽에 있는 사진입니다 강건이 폭사하게 됩니다 강건의 폭사와 함께 사실상 북한의 9월 공세가 실패로 끝나면서 북한의 공격의 거의 종말점 같은 역할을 했죠 왜냐하면 지금부터는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이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서는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이 낙동강 방어선이 우리가 말로만 들었지 이 전투를 하나하나 찾아보신 분은 많이 없으실 텐데요 정말 정말 치열했다 그럽니다
(18:12) 이걸 상징하는 군가가 하나 있죠 6.25 전체를 상징하는 군가라고 할 수 있는데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기억나십니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이 군가가 낙동강 방어선에서 나오게 됩니다 한번 들어보시겠습니다 아, 여기까지인데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까지는 정말 많이 들었을 텐데 그 뒷가사가 바로 이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입니다 낙동강 방어선 8월 공세, 9월 공세를 막아낸 다음에 드디어 진격을 한다 이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군가의 내용인데 이 군가에는 좀 슬픈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일화가 있냐? 이걸 보고 만드셨다고 하는데 실종된 줄 말았던 분대장 박노식 이중중사가 호 속에 앉아있기에 반가운 마음에 박중사하고 손을 잡으니까 몸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고
(19:16) 그는 기관총 손잡이를 꼭 잡고 눈을 부릅뜬 채 적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호 속에 앉아서 전사하신 그 모습을 보고 학도병 하나가 전우여 잘 있거라, 전우여 잘 가라 우리는 나아갈 것이다 라고 말했던 것에서 군가가 나왔다는 그런 일화가 있는 처절했던 방어전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50년 9월 15일 드디어 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이 개시가 됩니다 반격이 시작이었죠 우리가 잘 아는 인천과 서울을 수복하고 9월 16일 하루 뒤 낙동강 전선에 8군은 일제히 반격을 개시합니다 전군 북진하라나 9월 26일 오산에서 인천에 상륙했던 부대와 낙동강에서 올라가는 부대가 조우해서 만나면서 마침내 우리가 잃었던 국토를 거의 다 수복하고 드디어 38선 너머로 진격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게 됩니다 이게 우리가 국토를 회복하고 진격하기까지의 6.
(20:11) 25전쟁의 흐름인데 이 이후에는 2부를 한번 만들어보겠습니다 예전에 '장진호 전투' 한번 얘기했죠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 이런 게 등장을 하게 되는데 오늘 그것까지 얘기하면 너무 다 기니까 그래서 본격적으로 진격을 하게 됩니다 6.25 전쟁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지금 제가 쭉 말씀드리고 있는데 국가별 파병국의 전사, 사망, 실종자 수 합계를 보면 대한민국은 무려 17만여 명의 희생자를 낳았고요 미국 4만여 명, 영국도 약 1,200여 명이죠 약입니다, 약 튀르키예 약 900여 명, 캐나다에 약 500여 명, 호주 340여 명, 프랑스 270여 명 등등 수많은 군인들과 정말 셀 수 없는 민간인들의 희생이 있었죠 그리고 이분들이 바로 6.
(20:51) 25전쟁을 순국하신 장병들이 묻혀계신 곳이 제가 앞서 말씀드린 현충원입니다 가보시면 6.25 용사의 묘, 무명 용사의 묘, 이런 묘들이 많은데 특히 제가 몇몇 묘비들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현충원에 가시면 여러분들이 가서 헌화를 하실 수 있습니다 이름 없는 묘비라는 묘비가 있습니다 고 김수영 소위의 묘 예전에는 이름이 없는 묘비였어요 지금 이제 이름이 알려졌죠 6.25전쟁 당시에 자신을 김소위로만 소개했던 김수영 소위의 묘입니다 많이 유명해졌죠 당시 황규만 소위가 지휘하여 있었던 소대가 위기에 빠지자 돕기 위해서 나 김소위요! 하고 와서 같이 싸우던 동료가 북한군의 기관총에 전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황규만 소위는 김소위의 시신을 이동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거기에 안장을 하고 어딘지 위치를 기억했다가 나중에 찾게 되죠 다만 워낙 급박했기 때문에 나 김소위요! 밖에 이름을 얘기 안 해서 정확한 성명을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충원에 안장할 수 없었는데 1964년 육군 참모총장에게 청원을 하게 되고 이름 없는 묘비로 안장하게 됩니다 나중에 황규만 소위는
(21:54) 황규만 장군이 되시는데요 자기를 도우러 왔다가 목숨을 잃은 전우였기 때문에 2020년 사망 후에 김소위의 묘 옆에 나란히 안장되게 됩니다 가보시면 황규만의 묘 김소위의 묘 두 묘비가 나란히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호국형제의 묘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호국형제로 육군하사 이만우, 육군이등중사 이천우의 묘가 있습니다 유교 당시 홀어머니를 뒤로한 채 고향을 떠났다고 하고요 입대 당시 형이 22세, 동생은 19세였습니다 형이 입대한 지 한 달 만에 동생이 자원 입대를 하게 되고요 각각 서울수복작전, 평양탈환작전 등 주요 전투에 참가하여 무공을 세우게 됩니다 정말 6.
(22:35) 25전쟁이 끝날 때까지 형제가 나란히 살아남았으면 정말 좋겠지만 안타깝게 1951년 고향지구 전투에서 형이 전사하게 되고요 1년 후 동생, 한국전쟁이 거의 다 끝나가는데 고지전 그 자체죠 양구 백석산 전투에서 동생마저 산화를 하게 됩니다 동생 이천우의 유해는 끝내 수습되지 못해서 가묘로 있었는데 2010년 동생의 유해를 발견해서 60년 만에 형제애를 나누면서 영면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호국형제의 묘는 제가 다 일일이 소개시켜드리지 않았는데 무려 3개의 묘가 함께 안장되어 있는 것을 가서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이만우 하사, 이천우 이등중사 강영만 화사, 강영안 이등상사, 김봉학 일병, 김성학 일병 세 분의 호국형제 묘가 안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자, 그리고 나라를 위해 희생을 했지만
(24:38) 아직도 찾지 못한 12만 명이 넘는 6.25 전사자들의 유해가 아직 발견을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국군도 마찬가지고 미군도 아직도 찾고 있죠 휴전선 특히 뭐 북한에 있는 어떤 우리 전사자들의 유해를 가져올 수 있을까 이런 노력도 많이 하고 있고 아직도 여러분들 잘 아시죠? 흙을 하나하나 파내면서 지금 생존하신 분들과 DNA 대조를 하면서 지금도 6.25 전사자들의 유해를 찾고 있죠 근데 특히 안타까운 건 미국에서 6.25 전쟁을 뭐라고 부르냐? 잊혀진 전쟁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아마 들어보셨을 거예요 Forgotten War 6.25 전쟁은 잊혀졌다 왜냐하면 앞에 세계 2차 대전 뒤에 베트남 전쟁이 있죠 양쪽의 큰 전쟁 사이에 끼인 전쟁이다 보니까 미국에서는 Forgotten War라는 표현을 많이 쓰고 특히 북한에 대해서 미국 의회가 베트남처럼 완벽한 전쟁을 선포하고 들어온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는 분들이 정말 많지 않다는 거죠 미국의 전쟁하면 태평양 전쟁이나 아니면 베트남 전쟁을 떠올리는 게 미국의 현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25:35)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 워싱턴에 가보시면 아마 여기 가보신 분 많을 거예요 베트남 전 참전용사를 위한 추모의 벽, The Wall이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희생된 군인들의 이름이 쫙 적혀있는 The Wall, 그 벽이 있죠 베트남 참전용사의 벽은 1982년인데 6.25 전쟁 참전용사에 대한 추모의 공간이 없었다 믿기지 않는 현실인데요 2022년에 와서야 6.25 전쟁 추모의 벽이 워싱턴에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있죠 벽이 아래 쫙 있고 역시 6.25 전쟁에서 희생을 하신 장병들의 이름이 쫙 써있는 공간에 지금은 가보실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야 잊혀진 전쟁일 수 있지만 우리가 잊혀진 전쟁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6.
(26:17) 25 전쟁의 참혹함 또 정말 수많은 국가들 60개의 국이 힘을 합쳐서 막아냈던 6.25 전쟁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고 바로 잊지 말아야 될 날이 오늘 현충일이라고 할 수 있죠 6월 호국 보훈의 달 그리고 아직도 참전용사분들이 우리나라는 생존에 계시죠 그래서 얼마 전에 국가보훈부 국가를 위해 희생한 국군 참전용사분들에게 6.25 영웅 제복을 전달했다고 합니다 좌측에 있는 게 기존 단체복이었고 현재는 70주년 기념으로 오른쪽 요렇게 제복 모양 저는 개인적으로 오른쪽이 조금 더 멋있는 것 같아요 모양이 좀 이쁘기도 하고 뭔가 진짜 참전 용사 같고 요런 모습이 훨씬 예쁘지 않나 생각하는데 요런 만약에 옷을 입고 다니시는 분들을 보면 아, 6.
(27:00) 25전쟁에 참전하신 국군 참전 용사분들이구나 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자, 그리고 현충일에 어떤 추모 행사에 참석하고 싶은 분들은 추모도 하고 또 맛있는 것도 먹고 코리아 메모리얼 페스타라는 걸 펼친다고 합니다 아마 이렇게 백종원 선생님이 뭐 이렇게 같이 하는 걸로 제가 알고 있는데 백종원 선생님한테 광고를 받은 건 아니고 이런 것도 있으니까 6월 8일, 6월 9일 날 아마 가보시면은 현충일의 뜻도 기억을 하고 또 맛있는 것도 먹고 그런 공간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장소는 올림픽 공원이라 그래요 말이 길었습니다 저희가 6.25 전쟁을 쭉 알아봤는데요 결론적으로 6월 호국 보훈의 달, 현충일,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이분들이 희생이 없었다면 17세, 19세, 22세 이렇잖아요 우리가 지금 자유 대한민국을 누리기는 대단히 힘들었겠죠 제가 만약 저때로 돌아가면 이분들처럼 희생을 할 수 있었을까?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되는데요 지금 이 시간만이라도 이분들 잊지 말고 6.
(27:56) 25가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전쟁이 되기를 한번 기원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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